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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앤에이지, 연령주의 넘는 포용사회

휴먼앤에이지, 연령주의 넘는 포용사회

노인 차별 아닌 포용의 시대 – 연령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위한 질문

고령화는 통계가 아니라 일상이라는 말이 있다. 2024년 현재,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8%를 넘어섰고, 2030년이면 초고령사회(20% 이상)에 진입할 것이 확실시된다. 그러나 단순한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는 ‘삶의 질’과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정’이 노인 세대에게 보장되고 있는가는 또 다른 질문이다. 최근 열린 ‘제5차 아셈 노인인권: 현실과 대안 포럼’은 이러한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고자 한 자리였다. 중심 주제는 바로 ‘연령주의(ageism)’였다.

연령주의는 단지 무분별한 농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채용 과정의 배제, 공적인 결정에서의 소외, 도시 공간에서의 배려 부족, 미디어와 교육에서의 고정관념 강화까지 일상 전반에 드리운 구조적 차별의 장막이다. 나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이 없을 것’,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것’, ‘조용히 물러나야 할 존재’라는 편견은 사회 전체가 어떤 삶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가에 대한 거울이 된다.

고령화 속 제도는 무엇을 놓치고 있나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쳐 왔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효 문화는 약화됐고 가족 형태는 핵가족·1인 가구 등으로 다양화됐다. 그러나 복지, 노동, 고용, 돌봄 등 제도 설계는 이러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노인을 위한 제도는 시혜적이고 수동적인 지원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노인의 사회 참여는 오히려 제약되고, 독립성과 존엄한 노화를 위해 필요한 기회들은 제한되었다.

충남대 김주현 교수는 이러한 차별이 단순히 문화적 인식의 문제가 아닌, 정책과 제도의 불평등한 구조로부터 비롯된 결과임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고령 노동자의 지속 고용을 위한 제도 개선 없이 정년 연장만 논의되거나, 연금 수급은 있으나 지역이나 성별에 따라 혜택의 격차가 심한 현실 등이 그것이다.

국가·문화 따라 다른 양상, 그러나 닮은 뿌리

흥미로운 점은 연령주의가 각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뿌리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것이다. 호주의 말린느 크라소비츠키는 WHO가 개발한 ‘Ageism Scale’을 소개하며, 국가마다 연령에 대한 고정관념이 제도·언어·정책에 어떤 방식으로 침투해 있는지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란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사례는 복지정책 단계, 노동구조, 사회적 서사에 따라 연령주의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공적 노화’는 덫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사회 곳곳에서 강조되는 ‘성공적 노화’ 담론은 활력·자립을 강조하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의존은 실패’, ‘병든 노인은 사회의 부담’이라는 또 다른 낙인과 배제의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다. 즉, 누구의 노화가 가치 있는가라는 가치판단이 새롭게 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노인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키는 방향과는 오히려 배치된다.

연령포용 사회로 가기 위한 실천 전략

포럼에 참여한 여러 전문가와 실천가는 법률 정비, 교육, 세대 간 교류, 도시 공간 재설계 등 다차원적 접근이 필요함을 일관되게 지적했다. WHO와 ASEF 등 국제기구는 구조적 연령차별 해소를 위한 공공 데이터 확보, 권리기반 제도의 구축, 시민교육 강화 등을 제안하며, 단발성 정책이 아닌 포괄적 구조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Ageing 4.0’ 모델은 돌봄·노동·여가를 유연하게 통합하는 방식을 제시하며, 성별 격차와 무급노동 인정 문제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전략으로 눈길을 끌었다. 연대는 인식 개선으로 시작하지만, 제도 전략과 실천 메커니즘의 뒷받침 없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어떤 노화를 준비하고 있는가

연령주의를 극복하는 일은 노인을 위한 일이자,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다. 나이 든 사람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제도와 사회적 인식은 결국 나 자신이 맞이할 미래 환경이다. 인권은 특정 집단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이다. 시민, 교사, 정책가, 기업, 지역사회 모두가 자신이 속한 현장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령화 시대, 우리는 '몇 살까지 살 수 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자주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숫자가 아닌, 관계와 제도, 존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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