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 창정비에서 수출형 개발까지 – 조선 산업의 '특수선 집중 전략'이 던지는 시사점
그동안 민수선 중심이었던 한국 조선업은 최근 방위·특수선의 부상으로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맞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이 2025년 6월, 214급 디젤 잠수함 ‘윤봉길함’에 대해 1620건에 달하는 창정비를 계약 기한보다 35일 앞당겨 완료했다는 소식은 그 상징적 사례다. 단기간 조기 인도뿐 아니라, 군 전략 핵심 자산에 대한 정비·운영 역량을 동시에 입증했다는 점에서 산업구조 전환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선업의 구조적 변화 한가운데 서 있다. 수주 중심에서 유지·정비 중심으로, 민수 중심에서 방위 특수선 중심으로 산업의 무게추가 옮겨가는 흐름이다.
정비 역량의 고도화와 방산 연계 구조
윤봉길함의 성공적인 창정비 사례는 기존 ‘건조 후 납품’으로 평가되던 조선사의 수익 모델이, 이제는 ‘Lifecycle Based Business’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HD현대중공업은 총 1620건 중 무려 360여 건의 비계획 정비도 소화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력뿐 아니라 예측 변수 관리, 프로젝트 운영, 부품 소싱과 테스트까지 포괄하는 총합적 역량이 없으면 달성 불가능하다.
국방의 안정성 요구는 곧 유지·정비 시장 확대를 의미한다. 미국과 유럽 주요 조선사는 이미 수년 전부터 정비 수익이 전체 매출의 30~40%를 차지하는 ‘성숙 시장’ 구조로 진입했다. 한국도 정비 기반의 장기 계약, 모듈화 시스템 부품 관리, 함정 상태 모니터링 시스템 고도화 등을 통해 이 방향으로 전환 중이다.
특수선 수출, 틈새에서 기회로
HD현대중공업의 페루 수출향 1500톤급, 필리핀 원해경비함 등 다양한 수출형 모델 개발 착수는 특수선 수출시장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한국산 잠수함이 지난 수년간 동남아와 남미 방산 전시회에서 ‘기술 대비 가격 경쟁력’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후, 수출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방위산업 수출은 단가와 기술만이 아니라 안정성·운용성, 협력 패키지가 좌우한다는 점에서 HD현대중공업의 창정비 역량은 곧 수출 경쟁력의 실체로 연결된다.
특히, 중형급(1,000~2,000톤) 디젤 전기추진 잠수함은 원자력 기반 대형 전력보다 운용유지비가 낮아 신흥국 해군에게 매력적인 옵션이다. 세계 방산 시장에서 이급 잠수함은 가치 중심의 수요와 전략 운용 유연성을 모두 원하는 시장이라는 점에서 한국 조선업체에 구조적 우위를 제공한다.
글로벌 공급망 및 지정학 리스크 대체 수요
2024년 이후 글로벌 방위산업은 ‘자국 통제 가능 공급망’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유럽은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 이후, 아시아는 남중국해 및 대만을 둘러싼 충돌 우려로 인해 방위 전력 내제화 경향이 뚜렷하다. 이 와중에 한국의 해양 방산 기술은 ‘비동맹’, ‘비COTS(민수제품 전용)’로서 전략적 중립 자산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 무기체계의 개방·호환성은 NATO 체계와는 독립적으로 운영 가능하면서도 기술적으로 접점을 유지하는 전략적 구조를 제공하며, 중소국가 중심의 신규 수요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현업을 위한 전략적 인사이트
- 조선·제조업 전략기획 담당자라면, "건조 이후 정비" 기반의 수익 모델 확장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정비 패키징, 데이터 기반 함정 상태 예측 기술(PHM), 원격 정비 솔루션은 새로운 B2G 시장의 열쇠가 될 수 있다
- 부품·장비 공급업체는 ‘모듈 표준화’ 및 다국적 정비 호환성 확보에 집중해야 한다. 지정 기술 외에도 개방형 플랫폼이 확대될수록 데이터 연동 능력이 중요 자산으로 부각된다
- 수출 전략가는 방산 수출에서 제일 중요한 비기술 요인이 ‘운용 지원 및 유지 보수 체계’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정비 역량을 전방위 수출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결국, 잠수함 창정비는 단지 함정을 고치는 작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기술 내재화, 수출 신뢰성, 데이터 기반 정비 플랫폼 구축 등 산업 구조 전반에 영향을 주는 신호다. 한국 조선업은 여전히 세계 1위지만, 그 경쟁력의 본질은 단순한 건조가 아니라 ‘운영 가능한 전력 자산’을 만드는 능력으로 이동 중이다. 이 변화에 먼저 적응하는 자만이 새로운 해양산업의 전략지형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