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화장품이 만든 변화 – 물리적 접근성과 감정적 자유의 경계에서
‘흰지팡이의 날’을 맞아 코스메틱 브랜드 리브엠이 경기도시각장애인복지관에 점자 화장품을 후원했다는 소식은 사회적 포용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움은 모두의 권리인가?” 그리고 “장애인의 일상은 사회 제도와 상업적 흐름 속에서 얼마나 실질적으로 반영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이러한 후원이 단지 기업의 ‘일회성 CSR활동’인지, 아니면 제도적 배경과 생활 속 문제를 읽고 그 공백을 메운 실질적 참여인지는 긴 호흡의 분석이 필요한 지점이다.
시각장애인과 정보 접근성 – 실체적 평등을 위한 전환
시각장애인은 일상에서 겪는 정보 격차가 심각하다. 특히 시중에서 판매되는 생필품, 식료품, 의약품, 그리고 미용제품까지 대부분의 포장이 시각정보에 의존하고 있어 선택의 자율성이 제한되고 있다. 대한민국 시각장애인 수는 약 26만명, 이 중 상당수는 전맹이거나 심각한 저시력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위한 점자 표기 의무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현행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및 ‘점자법’ 등은 공공시설이나 교육·행정 분야의 점자 접근성을 강조하지만 민간 제품군에는 선택적 적용이 많다. 이에 따라 각종 제품의 정보 전달 미비로 인해 시각장애인의 소비자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되기보다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하는 형국이다.
아름다움의 통제권 – 단순한 사용 편의성 그 이상
후원된 점자 화장품은 단순히 제품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 아니다. 이전까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사용이 어려웠던 화장품이라는 사적이고 정체성을 담은 제품을 본인의 손으로 골라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는 ‘비시각장애인을 위한 뷰티 산업’이라는 기존 가치 중심에서 벗어나,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아름다움을 결정할 권리를 되찾는 과정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미용은 단순한 외모 변화가 아니라 자아존중감, 사회 관계, 노동시장 참여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접근권의 보장은 곧 삶의 질 보장과 연결된다.
소비자 권리와 산업의 역할 – 사회적 감수성은 누가 주도할 것인가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제품 기획 단계에서 ‘장애인의 사용 경험’을 고려하지 않는다. 한편 뷰티 산업은 수년간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을 추구해 왔으나, 시청각 장애, 지체 장애 등 다양한 감각 경험을 모두 다룬 제품은 드물다.
하지만 소비 시장의 흐름은 변하고 있다. ESG 경영의 핵심인 ‘사회적 책임’이 단순한 홍보 요소를 넘어서 구매 결정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소비자들 역시 포용적 가치에 눈뜨고 있다. 이는 기업이 ‘감동적 CSR’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제도적 공백을 채우는 민간 영역의 실천 주체로 성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제도의 보완과 생활 속 실천 – 점자는 누구의 책임인가
이번 점자 화장품 사례는 ‘점자 표기의 일상화’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교육부의 조사에 따르면 점자 해독 능력이 없는 시각장애인이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현실 속에서, 점자 교육과 표기 확대가 병행되어야 실질적 변화가 가능하다.
해외에서는 이미 적극적인 제도적 조율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은 약품뿐만 아니라 일부 화장품에도 점자 표기를 권고하며 민간 기업과 제도 간 협력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장애인 접근성 인증 제도를 화장품 등 다양한 생활 제품으로 확대하고, 점자 표기 지침을 국가표준으로 구체화하는 방식이 검토될 필요가 있다.
다시 묻는 질문 – 포용은 일상의 어디까지 왔는가
‘손끝으로 읽는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은 장애인의 권리가 단지 ‘보호 대상’이 아니라 ‘일상과 정체성의 주체화’임을 강조한다. 이번 점자 화장품 사례는 기술, 감수성, 제도, 시장의 협력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포용의 지속은 우발성이 아닌 구조적 반영 속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시민은 공공이나 시장이 놓치는 사각지대에 귀 기울일 책임이 있다. 제품을 만들 때, 소비할 때, 혹은 정책을 입안할 때, 우리는 일상의 기준이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포용은 거대한 개혁보다 작은 배려에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