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연가’가 물들인 밤 – 세대와 세대를 잇는 서정의 울림
늦여름이 가는 길목에서,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이 서정의 온기로 채워졌다. ‘제12회 임긍수 가곡의 대향연’은 단발성 음악 이벤트를 넘어, 한국 가곡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감성의 다리로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한 곡의 노래가 있다. 서요한 작시, 임긍수 작곡의 신작 가곡 ‘달빛 연가’. 이 곡은 단순한 초연이 아닌, 한국 가곡의 감수성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가슴속 추억을 일으키는 문장들이 노래가 되다
‘달빛 연가’는 그저 사랑에 관한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중년의 사랑과 그리움을 배경으로, 세월의 물결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노래다. 가사에는 서산 붉은 노을과 달빛, 목련 그리고 소쩍새 같은 한국적 자연 이미지들이 겹겹이 들어서 있다. 이런 시적 장면들은 삶의 한 단락을 지나온 이들에게는 깊은 향수를, 청년들에게는 미래의 감정적 지형을 예감하게 만든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내 마음은 그날의 강을 따라 흐릅니다.”
후렴구의 이런 문장들은 누군가의 오래전 여름밤을 소환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내일을 준비하게 만든다. 이처럼 한 편의 시가 되살아나듯 삶을 노래하는 순간, 우리는 문화 콘텐츠가 감정을 어떻게 매만지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는 마음, 그것이 문화의 힘이다
이날 공연은 ‘달빛 연가’ 외에도 ‘봄나무들의 향기’, ‘늦가을 단풍나무’, ‘고목가’ 등 22곡의 한국 가곡들이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호흡했다. 특히 고 이승만 대통령의 시에 곡을 붙인 '고목가'가 연주됐을 때,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무르게 연결했다.
전통 가곡은 때로는 ‘낡은 노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는 형태보다 ‘감정의 진동수’로 기억된다. 이 공연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일상 속 감정들—가령, 지나간 첫사랑, 젊은 날의 흘러간 말들, 풍경 너머로 사라진 이름 없는 계절들—이 여전히 가곡이라는 언어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감성은 기술보다 사람을 오래 붙든다
오늘날 MZ세대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수많은 콘텐츠를 소비한다. 이들이 클래식이나 가곡을 찾는 일은 드물지도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진짜 감정'에 대한 갈증이 있다. 디지털 콘텐츠로 채울 수 없는 공백들, 바로 그것이 ‘달빛 연가’ 같은 작품이 주는 정서의 자양분이 된다.
이번 무대에서 중장년 관객은 젊은 날의 러브레터를 떠올렸고, 젊은 관객은 부모 세대의 정서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문화는 세대한테 말을 걸었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걷는 길이 있다고, 노래하고 있었다.
우리가 오늘 다시 느껴야 할 가곡, 그 여운
‘달빛 연가’는 묻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 유행, 소음과 속도의 시대이지만 결국 끝까지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감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 그중에서도 말과 선율이 융합된 ‘가곡’에서 가장 강하게 울린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어떨까. “내 안의 달빛은 아직 살아 있는가?” 잠들기 전, 이어폰을 타고 흘러오는 한 곡의 가곡을 감상해보자. 그리고 그 곡이 불러일으키는 옛 풍경 하나를, 삶의 어귀에 다시 살며시 놓아보자.
무겁지 않게, 때로는 은근하게. 감성이 우리 삶에 다시 말을 건네도록 두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일상 속 문화를 감각하는 가장 서정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