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장애예술 무대 확대의 과제

장애예술은 왜 더 많은 무대를 필요로 하는가 – 문화접근권의 확장과 제도적 숙제

차별과 고정관념을 넘어서 '예술'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장애예술.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며 공개한 엠블럼과 캐릭터는 단지 기념의 의미를 넘어 장애예술의 보다 공공적인 미래를 향한 다짐에 가깝다. ‘나이테’에서 착안된 엠블럼은 시간의 축적과 성장을 상징하며, 장애예술의 지속성과 디딤돌로서 제도의 역할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상징 뒤에는 여전히 ‘접근 가능한 문화는 누구의 몫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이 존재한다.

10년의 성장, 그 제도적 지형

2015년 설립 이래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하 장문원)은 예산 확보, 전담 조직 지정, 문화예술 공간 창설 등 제도적 기반을 나름 탄탄하게 마련해왔다. 2017년 21억 원이었던 장애예술 지원 예산은 2025년 기준 64억 원으로 3배 이상 늘었고, 서울에 설립된 ‘이음’을 비롯해 ‘모두예술극장’, ‘모두미술공간’까지 운영 영역도 확장됐다. 2023년 창작물 우선구매제도와 2024년 의무공연·전시제도 또한 문화예술 활동의 공적 책임과 가치를 명확히 하는 정책이다.

한편 이러한 제도 형성은 UN 장애인권리협약(CRPD) 제30조가 명시한 장애인의 문화생활·여가·체육 참가기회 보장 요구에도 응답하는 흐름과 닿아 있다. 예술은 단지 표현의 수단이 아닌, 인간성과 자율성을 드러내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현장의 열정, 제도의 간극

그럼에도 여전히 현장과 제도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무대 기술, 자막 시스템, 수어 통역 등 장애예술인을 위한 ‘접근성 인프라’는 예산 증가에 비해 충분히 확장되지 않았다. 장애 예술인의 상당수가 창작 초기부터 공연·전시에 이르기까지 구조적 지원보다는 개인 네트워크와 예술가의 헌신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한 문제다.

예술의 본질이 평가보다 공감에 있다면, 참여자의 다양성은 수용자의 감수성 훈련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중 역시 배리어프리 정보 부족, 장애 예술에 대한 인식 결여 등의 문제로 ‘장벽 없는 관람’의 경험을 갖기 어렵다. 이는 기획 단계부터 ‘모두의 접근성’을 설계하는 담론이 아직 문화계 전반에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장애, 예술, 그리고 공익의 접점

‘장애인은 예술의 주체일 수 있는가’라는 고정관념과 싸워온 지난 10년의 변화는 분명하다. 장애예술 아카데미 운영, 예술 매개자 양성 등은 그 상생적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공공기관에서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무대 제공을 넘어 장애예술을 ‘지속 가능한 생태계’로 발전시킬 구조다.

예컨대 장애 예술인의 고유성과 노동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시장 연계 방안, 비장애인 협업자와의 공정한 로열티 구조, 지역 기반 예술 발전과의 연계 등 구체적 지원책 개발이 시급하다.

해외에서는 예술과 복지, 인권이 별개 영역이 아니라고 보는 흐름이 뚜렷하다. 예를 들어 영국은 장애 예술단체에 대한 공적 지원을 예술 위원회에서 별도로 기획하며, 문화 다양성 증진의 하나로 정책화하고 있다. 이는 예산과 의제 설정 과정에 장애예술인을 실질적 주체로 참여시키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후 10년의 방향, 우리 모두의 시선

장문원의 10년은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레퍼토리를 변화시켜온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장애예술인은 ‘지원 대상’이자,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자율성을 이중으로 설명받아야 한다. 이 모순을 풀어가는 힘은 제도와 현장의 균형, 비장애인 사회의 인식 개선, 다양한 주체 간 연대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장문원이 예고한 ‘모두의 예술, 함께하는 미래’라는 슬로건은 단지 장애인을 위한 슬로건이 아니다. 이 말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우리 모두의 더 넓은 감수성과 실천이 필요하다. 예매 시스템부터 공연장 설계, 예술 평가 방식까지 '접근 가능한 문화'를 상식화해 나가는 공감적 구조는 결국 우리 모두의 문화 민주주의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문화는 선택이 아닌 권리라는 인식이 문화기관, 기획자, 시민들, 그리고 교육의 언어 속에 자리 잡을 때, 장애예술은 더 이상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국사회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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