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사회, 문화예술로 돌보다 – 예술치유가 제도 밖을 움직이는 방식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양적 복지정책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질적 돌봄의 공백이라는 복합적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근래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공동 주최한 예술치유 지원사업 ‘마음치유, 봄처럼’은 이 공백을 예술이라는 비제도적 접근으로 메우는 실험이다. 예술치유 전문기관 피어나는 해당 사업에 선정되어, 정서지원이 필요한 고령층과 감정노동자를 위한 음악 기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예술이 복지 실천의 보조적 수단을 넘어, 정책의 한계를 보완하는 대안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치유는 어떻게 제도 밖 케어를 실현하는가
치매안심센터와 협업하는 피어나의 프로그램은 단순 공연 관람을 넘어, 참여 어르신의 삶과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이를 함께 공유하는 형식이다. 이는 물리적 복지 서비스가 압도적으로 식별하는 ‘의료적 질환’이 아닌, 존엄과 기억, 관계 회복 같은 정서적 필요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도시의 노년층이 겪는 심리적 고립, 사회적 단절 문제는 전통적 복지 모델이 간과해온 영역이다. 예술치유는 이러한 틈새를 메우며, 참여자 스스로의 내면을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제도적 사각을 메우는 ‘비정책적’ 실천의 한계와 가능성
문화예술 기반의 치유 프로그램은 여전히 제도적으로 제한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이나 복지부의 복지서비스 고시체계에는 문화치유 활동이 명문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예산 편성도 단기사업 위주로 이뤄진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예술치유는 지속가능성보다 공모형 일회성 모델에 기대고 있으며, 참여자들의 꾸준한 접근성과 효과 측정을 위한 기반 마련이 어렵다. 그러나 피어나의 사례처럼 실무자 중심의 연계 노력과 지역기관과의 협업 구도는 일회성 사업을 지역 돌봄생태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공감노동자를 위한 예술적 자가돌봄 실험
이번에 별도로 선정된 프로그램 ‘MUSICFULNESS’는 주목할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감정노동자나 예술치유 실무자와 like-minded profession들을 위한 단회기 프로그램이 안전하고 회복적인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돌봄의 주체 또한 돌봄이 필요하다는 최근 사회복지학의 관점이 반영됐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드러난 돌봄 제공자의 심리소진 문제는 보건의료와 사회복지 영역을 재구성해야 할 열쇠로 주목받는다. 이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자가돌봄’은 자기 인식과 회복력 증진이라는 개인 중심 접근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돌봄 구조의 회복력 전체를 강화하기 위한 공동체적 자원이라 할 수 있다.
치유는 정책이 아니라 ‘감각의 재정렬’이 될 수 있는가
문화와 예술이 복지정책에서 기능적 차원으로만 간주될 때, 예산과 효과성의 논리에 의해 구조적으로 축소될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예술이 감정을 통과시키고, 공동의 기억을 형성하며, 삶의 맥락 속에서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철학적 도구’임이 점점 증명되고 있다. OECD의 2022년 'Well-being Framework' 보고서도 사회적 연결과 심리적 안정에서 예술과 문화의 기여를 강조하며, 복합적 욕구를 가진 계층에 있어 '복지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개인의 감정과 공동체의 회복력을 잇는 시선
예술치유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치유는 의학적 치료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방식이며, 복지의 이념을 보다 포용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이다. ‘마음치유, 봄처럼’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서비스의 제공 여부를 넘어 우리 사회는 정서적 빈곤에도 공공의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하는 구조적 물음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관, 시민, 공무원, 지역공동체 단위에서 인식의 전환이다. 예술치유가 사치가 아니라 회복의 언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정책은 여기에 따르는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한다.
치유는 서로에게 닿기 위한 통로이자 사회적 관계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예술을 통한 복지가 우리의 일상에 닿으려면, 제도와 현장의 경계를 허무는 유연성과 연결의 감각이 더욱 요구된다. 이제 우리는 “돌봄은 누구의 몫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넘어, “어떻게 서로를 돌볼 수 있을까”라는 예술적 질문을 던질 시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