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독서라는 문화적 의식 – 대하소설로 재조명하는 이야기 소비의 진화와 비평의 책임
바야흐로 ‘서머 리딩’의 계절이다. 해변에 펼쳐놓은 긴 소설 한 권은, 단순한 휴식이 아닌 하나의 문화적 의례가 된다. 『뉴요커』가 권한 이번 시즌의 “메가 리드(mega-reads)”는 단지 두껍고 장대한 서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서를 통한 존재 탐구, 역사적 성찰, 그리고 내면의 은밀한 기록을 꺼내는 의식과도 같다. 흥미롭게도 이 목록은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고, 장르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성적 독서문화를 반영해낸다. 이 현상은 단순한 문학 소비의 재활성화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사유하는 감각적 실천이다.
1. 고전소설의 재소환: 인간 존재에 대한 끝없는 재해석
케이시 셉이 다시 불러낸 『모비 딕』은 단순한 고전의 복습이 아니다. 찰스 올슨의 기묘한 평론 『Call Me Ishmael』부터 코로나를 통과한 시적 메타픽션 『Dayswork』에 이르기까지, 멜빌 세계를 둘러싼 2차 관독(再讀)의 움직임은 독자가 단지 콘텐츠를 소비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고전을 재문맥화하는 능동적 재해석자임을 보여준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 이후, 오히려 독자의 권력을 재확인하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2. 서사 공간으로서 '집'과 '일상': 여성성과 소설성의 재발견
지아 톨렌티노가 소개한 『더 카젤 크로니클스』(Elizabeth Jane Howard)는 전쟁과 정치가 아닌 가정과 감정의 노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종종 “여성전용”으로 폄하돼온 가정 서사에 대한 문학적 재격상을 주장한다. 힐러리 멘틀 역시 이 작품의 저평가를 가부장적 문학비평의 산물로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작은 이야기의 힘”을 통해 서사의 정치성을 재구성하는 여성주의적 읽기의 귀환을 뜻한다.
3. 글로벌 서사의 도전: 고대에서 현대까지 지속되는 인간 조건 탐색
천년을 넘는 생명을 지닌 『겐지 이야기』(무라사키 시키부)는 줄리안 루카스의 시선에서 “문학 속 반짝이는 플레이보이이자 허무주의자”로 다시 태어난다. 고대 일본 궁정의 에로티시즘과 존재론이 현대 독자의 욕망과 맞물리며, 문화 간 해석의 유희를 가능케 한다.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계문학’ 개념을 재고하며, 번역과 재독을 통해 문명사의 심연을 탐사하는 작업이다.
4. 대형 서사의 윤리: 전쟁, 권력, 죽음에 대한 질문
제니퍼 윌슨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끄집어낸 장면은 단순히 역사소설의 감상이 아니라, 가자지구의 잿더미 속에서 발견된 책 한 권의 운명과 연결된다. 이때 고전은 현실의 참상을 직면하는 예언적 장르로 변모한다. 마이클 루오가 읽는 『제3제국의 권력』과 같은 현대 역사서는 급변하는 정치 동학 속 과거와 현재의 병치를 통해 파시즘의 재현성에 대한 경고를 암묵적으로 전달한다.
5. 장르의 융합, 팬덤과 서사의 공유적 감각
조슈아 로트만과 화슈가 주목한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와 조너선 힉만의 그래픽 노블은 리얼리즘과 판타지, 철학과 대중성을 교직하는 하이브리드 서사를 실험한다. 이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팬덤과 메타텍스트의 층위를 함께 재구성하게 하는 서사 공유의 시대적 징후다. 특히 그래픽노블의 재부상은 이미지 기반 서사에 대한 현대인의 감수성과도 맞물려 있으며, 기억과 정체성의 시각화된 표현을 가능케 한다.
이 여름, 『뉴요커』가 제시한 이 ‘메가 북’ 리스트는 단순한 추천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비평적 제안이다. 우리는 이 목록을 통해 다음의 질문을 품게 된다. “문학은 어떤 방식으로 시대의 비의(秘義)를 말하는가?”, “거대한 서사는 왜 지금, 이토록 절실한가?”
문화 향유자로서의 독자는 이제 단순히 책을 읽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다시 읽고, 비교하고, 연결하는 큐레이터이자 해석자다. 그리하여 제안한다. 이 글을 읽은 뒤에:
- 한 권의 장편을 손에 쥐자. 『모비 딕』이나 『겐지 이야기』처럼 너무 고전이라 접기 어려웠던 책도 좋다.
- 여러 번역본이나 비평서를 병행해 읽으며 텍스트의 다층성을 탐색해보자.
- 온라인 독서 커뮤니티에서 감상을 나누며 서사의 공공성에 참여해보자.
- 거대한 이야기에 숨겨진 당대의 이념, 제도, 감정 구조의 코드를 파악해보라.
이것이 곧 예술과 문화를 통해 우리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