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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항해사, 기술과 권리의 항해

맹인항해사, 기술과 권리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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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도전 사이의 간극 – ‘맹인 항해사’ 프로젝트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시각장애인 이와모토 히로의 ‘단독 태평양 무기항 횡단’ 도전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다. 이는 기술, 제도, 사회적 인식의 경계를 동시에 시험하는 사회 실험이자, 장애인의 자율성과 선택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2027년, 위성 통신과 음성 내비게이션, 원격 지원망이라는 새로운 디지털 기반을 동력 삼아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소개된 이 프로젝트가 사회적으로 특별한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가능성 뒤에 놓인 선택의 자유와 공적 기술의 역할에 있다.

선택의 자유가 막히는 제도, 그리고 디지털이 만든 새로운 지평

히로가 강조하는 중심 키워드는 ‘선택(Choice)’이다. 그는 10대에 시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스스로 인생을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고, 이후 모든 도전은 그 결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제도 속에서 장애인의 ‘선택의 자유’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아직 많은 공공시설은 휠체어 접근성이 낮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디지털 정보의 접근성 수준도 질적으로 편차가 크다. 2023년 기준, 장애인 디지털 정보 접근성 평가에서 공공기관 웹사이트의 40%가 ‘기준 미달’로 나타났다(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그에 반해 히로의 항해는 민간 기술 기반의 협업 시스템으로 이루어진다. 위성 통신 스타링크, 고감도 카메라, 음성 인터페이스, 원격 관제 시스템은 히로의 ‘눈’이 되어 줄 것이다. 이처럼 민간 기술은 장애인의 자립성과 도전의 범위를 확장하지만, 역설적으로 국가의 제도는 이를 뒷받침하는 보편 인프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인식을 넘어 시스템으로 – 장애에 대한 사회적 레토릭을 넘어서야 할 때

히로의 항해가 환호받는 이유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해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사는 자칫 장애인의 성공을 ‘개인의 극복’으로 환원하는 오류에 머무를 수 있다. 선의와 감동 뒤에 가려진 구조적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한국의 장애인 고용률은 2022년 기준 37.8%에 머물며, 비장애인(63.1%)과 여전히 큰 격차를 보인다(통계청 ‘장애인 경제활동보고서’). 이는 단순히 ‘도전이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직장 내 편의시설, 고용 차별, 업무 배치 등 제도 설계 자체가 장애인을 비가시화하는 경우가 많다.

히로의 프로젝트는, 따라서 “왜 한 개인만이 이런 도전과 기술을 누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평등은 감동이 아닌 권리로 접근할 때 비로소 일상화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히로 같은 영웅이 아니라, 장애를 이유로 선택지가 좁아지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다.

해외 정책은 어떻게 ‘기술+권리’를 결합했나

미국은 이미 장애인법(ADA)에 따라 공공기관과 기업의 디지털 접근성 기준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으며, 위반 시 법적 소송이 가능하다. 일본도 동등한 디지털 접근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디지털사회 형성 기본법(2021)’을 통해, 공공과 민간 디지털 자원의 접근성 확장을 명문화했다.

이와 모토의 출발지인 미국 샌디에이고에서는 지역 사회 전체가 프로젝트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국가 차원의 법적 기반과 지역 공동체의 연대 구조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민관 연계 구조가 단편적이고 프로젝트 중심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강하다.

삶을 밀어주는 기술, 법으로 지켜주는 사회

‘히로의 선택’ 프로젝트는 단순한 감동 서사로 소비되기엔 너무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 이 도전이 가능했던 기술과 인간적 연대는, 우리 사회가 어디서부터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를 암시한다. 기술은 사회를 향해 열려 있을 때 평등한 도전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그 기술이 공공재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많은 이들의 꿈은 닿지 못한 먼바다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마무리하며, 이 글은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된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선택과 꿈을 보편적 권리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는가, 아니면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가?” 시민은 일상에서 장애를 고려한 서비스 이용 습관을 고민할 수 있고, 기업은 디지털 접근성을 경영 평가에 반영해야 하며, 정책 입안자는 감동뿐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가능성의 객체’가 아닌 ‘존엄의 주체’로서 장애인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할 시점에 와 있다.